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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would you like to have for a Christmas present?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고 싶은 거 있어?
a job.
일자리.
스티븐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가지고 싶은 게 없냐고 물었을 때 내가 대답했던 말이었다.
한국을 떠난 3년 후의 나는 절박했다.
나이는 삼십이 가까워지는데 하루 잘 곳, 한 끼 먹을 걱정을 매일매일 하며 사는 하루였다.
이민자의 삶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혹독했다.
나는 매일 매일을 사막에서 홀로 우물을 파는 것처럼, 그렇게 살았다. 모래를 한 움큼 파낼 때마다 말라죽어가고 있었지만 될 때까지 계속 파냈다.
이 한 풀 을 시 작 한 이 유
한국에 있을 때 나의 경력은 프리랜서 아티스트였다.
나는 다른 친구처럼 길거리에 나가 캐리커처를 할 용기도 없었고,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할 정도로 거기에 걸맞는 경력도 없었다.
어눌한 영어는 나의 자존감과 자존심을 점점 작아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느날, 이렇게 작아지다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오랜시간 동안 매일 실패하고, 매일 좌절하고, 다음날 다시 일어나 또다시 도전했다.
나를 업신여기거나, 차별하거나, 가치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나를 증명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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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말했다. 외국가서 일자리 구하고, 한국에서 일하는 것처럼 열심히만 일하면 먹고살만하다고. 맞다. 일단 꾸준히 일을 하기만 하면 비자도 나오고 어느 정도 입에 풀칠은 하고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처음 나를 받아주는 회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허드렛일만 하는것도 진절머리가 났다. 해외에서는 일에 귀천이 없다고 하는데 그런 헛소리는 믿지 말기 바란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대놓고 멸시를 안 하는 것뿐이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를, 긴 시간동안 공부하고 트레이닝해야 하는 의사와, 누구라도 내일당장 일할 수 있는 청소부가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종종 잊고 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계급이 있다.
나는 불가촉 천민이었다. 돈도 없고, 말도 잘못하고, 청소나 하는 외국인 노동자. 최하층 인생이었다. 해마다 나이도 먹어가니, 시장가치가 떨어져 갔다.
맥도널드 더블 치즈버거가 나에겐 사치였던 시절이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로 버젓한 직장에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전재산을 털어 학교까지 나왔는데도 일자리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였다.
각종 수상경력, 대기업에서 받은 스폰서 쉽, 인턴십 경력, 디자인 경험도 있었지만 회사들은 나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문밖에서 내쫓긴 경험만 수십 번이다.
그들은 그들만의 기준과 룰이 있었고, 거기에 걸맞지 않으면 가차 없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현재 나는 입맛에 맞는 회사를 고를 정도로 쓸만한 경력을 가진 디자이너가 되었다.
요즘은 이력서를 내면 빠르면 당일, 늦으면 며칠 안에 인터뷰 하자는 전화가 쇄도한다.
십 년 전으로 돌아가, 그때를 회상해보면 너무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이 글은 십 년 전의 나와 같은 누군가를 위한 것이다.
만약 현재의 내가 만약 십년전의 나를 만났었더라면, 인생이 크게 변했을 것이다. 방법을 알았더라면,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눈물로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경험들이 외국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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